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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강 낙화암

장유 2013. 5. 3. 19:35

 

백마강

다양한 볼거리가 풍부한,

전라북도 장수군 장수읍에서 발원하여 충청남․북도를 거처 강경에서부터 충청남도·전라북도의 도계를 이루면서 군산만으로 흘러드는 금강(錦江)의 하류 구간을 일컫는 명칭으로 백마강은 "백제의 제일 큰 강"이란 뜻으로 규암면 호암리 천정대에서 세도면 반조원리까지 16㎞의 금강을 일컫는다.

 

《삼국사기》에는 백강(白江), 《일본서기》에는 백촌강(白村江)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백제의 도읍이 들어선 이후로 금강의 역할이 더욱 커졌는데, 특히 백마강은 일본, 신라, 당나라, 서역에 이르도록 문물교역의 큰 길목이 되었던 곳이다.

 

 

 

 

 

 

 

 

 

 

낙화암

충남 부여 백마강변의 부소산 서쪽 낭떠러지 바위를 가리켜 낙화암이라 부른다. 낙화암은 백제 의자왕(재위 641∼660) 때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이 일시에 수륙양면으로 쳐들어와 왕성(王城)에 육박하자, 궁녀들이 굴욕을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이곳에 와서, 치마를 뒤집어쓰고 깊은 물에 몸을 던진 곳이라 한다. 『삼국유사』, 『백제고기』에 의하면 이곳의 원래 이름은 타사암이었다고 하는데, 뒷날에 와서 궁녀들을 꽃에 비유하여 낙화암이라고 고쳐 불렀다. 낙화암 꼭대기에는 백화정이란 정자가 있는데, 궁녀들의 원혼을 추모하기 위해서 1929년에 세운 것이다.

 

낙화암과 삼천궁녀

 

백제의 마지막 수도였던 사비성의 부소산 서쪽에는 낙화암이 있다. 

전설에 의하면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할 때 의자왕과 삼천 궁녀가 이곳에서 

떨어져 자결을 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의자왕은 당에 끌려가 병으로 죽었고, 궁녀 삼천 명이라는 숫자 역시

패망한 국가의 안타까움을 문학적으로 표현한 것일뿐 역사적 사실로 보기 어렵다.

'삼천궁녀'라는 표현은 조선 후기의 문인이 문학적 표현으로 

처음 썼지만, 일제 강점기를 거쳐 1960년대까지 대중 가요의 가사로 널리 불리면서 

일반 사람들에게 잘못 알려진 것이다.(퍼옴)

 

 

 

 

 

 

 

 고란사 (皐蘭寺)

충청남도 문화재 자료 제98호

소재지:부여군 부여읍 쌍북리산1

 

고란사가 언제 창건 되었는지 알수가 없다

백제 제17대 아신왕때 창건 되었다는 설도 있고

낙화암 에서 목숨을 던진 백제 궁녀들의 원혼을 추모하기 위해

고려 초기에 창건하였 다는 설도 있다

 절 이름은 뒤편 암벽에서 자라고 있는 고란초에서 따왔다

 

법당 건물은 조선정조 21년(1797년) 은산의 숭각사에서 옮겨온 것이다

연화문을 새긴 초석을 놓고 원 기둥을 세웠는데 기둥위에는

조각장식이 화려한 "익공식" 공포를 짜 올렸다

초석에 새겨진 연화 문양은 고려시대의 기법으로 추정된다

사찰의 주변 경관이 아름답고 낙화암에 얽힌 전설과 더불어험준하며

기이한 바위.고란초 등으로 유명하다.

 

 

고란사의 고란정.

절 뒤 바위 틈에 고란정이 있으며, 그 위쪽 바위틈에 고란초가 나 있다.

 

부소산 백마강 가의 고란사 뒤의 절벽에서 자라기 때문에 고란초라는 이름이 생겼다.

절벽 밑에서 솟아나는 물을 고란정이라고 한다.

전설에 따르면 백제 궁녀들이 임금에게 바칠 물을 고란정에서 받아갈 때 고란초 잎을 한두 개씩 물 위에 띄웠다고.

 

 

 

 

고란사에서 낙화암으로 가는길.

 

 

 

 

 

 

 

 

여기는 낙화암 위에 있는 백화정이라는 정자이다.

여기서 시 한편 읊조리기는 좋을 듯.

 

 

낙화정에서 망중한.

 

 

 

 

 

 

 

 

 

백화정 근처로 보이는 백마강의 모습은 가히 장관이었다.

 

백화정 근처로 보이는 백마강의 모습은 가히 장관이었다.

 

 

 

 

동래 전철역.